폭싹 속았수다
박기관
소중한 사람이 내 곁을 지켜준 것처럼
한 편의 드라마가 봄과 함께 왔다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도
‘폭싹 속았수다’
삶의 파노라마가 하얀 벚꽃 속으로 흩날리고
유년의 강은 파도에 밀려 깊은 바다로 갔다
빛바랜 사진첩 속 청춘의 추억은
추락하는 생의 격정 속으로 날리고
중년의 들녘은 황혼에 밀려 높은 산으로 갔다
111번 버스 창밖으로
난곡에서 신정동까지
아카시아 꽃이 하얀 눈처럼 날리면
멀게만 느껴진 어제가 오늘처럼 낯설고
두려웠던 오늘은
희망찬 내일로 잇는 격변의 시간들이었다
찬란한 여름이 눈부신 가을이 되어
겨울로 오면
소중한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간 것처럼
한 편의 드라마가 봄과 함께 갔다
나도 당신도 그리고 우리 모두도
‘폭싹 속았수다’
내 아버지의 꿈
박기관 · 2025. 5. 7. 처음 쓰고 2026. 1. 18. 고쳐 씀
오월의 찬란한 봄
아버지의 꿈은 사라졌다
처음 비행했다던 고공의 추락점에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너머로
보았던 그 꿈
마도로스가 되어 돌아온 내 아버지
나는 마도로스가 되고 싶다
이 척박하고 어지러이 엉킨 땅을
벗어나 저 너머로
펄럭이는 돛의 깃발이 잇닿을 푸른 바다
밤새 유랑하다 돌아온 내 아버지
아, 나의 영원한 마도로스여
눈이 내리면
박기관
하얀 눈이 내린 것을
처음처럼 기뻐하는 것은
당신이 맑다는 것입니다
잿빛 하늘을 올려보는 것은
어머니의 따스한 품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살포시 눈을 밟고
귓가로 스며드는 소리를 듣거든
당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얀 눈이 내리는 것을
가슴으로 느껴보는 것은
당신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호박꽃
박기관
화려한 꽃들은
바람도 불기 전에
비도 오기 전에
벌써 누워버렸는데
그래도
노오란 호박꽃은
가만히
당당하게
피어 있습니다
해맑기도 하고
조금은 아련한
노오란 호박꽃
우면산 가을
박기관
여러 해를 살다 간
옥잠화의 흔적
장마도 없이
목마르던
여름이 가고 있다
흩어진 회양목 사이로
길게 드리운 억새
신갈나무 아래서
때그르르
구르는 밤톨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리워하던 사람이
나를 그리워하는
아,
그 가을이
오고 있다